내면지도_지도에 없는 표지판에 대하여
이번주 일정은 무엇인가요?
오늘 할 일은요?
오후에 갈 곳, 연락할 사람, 처리할 일. 외근 동선, 회의 시간, 저녁 약속.
하루의 지도는 늘 빼곡합니다.
그런데 이 지도에는 빠져 있지만 삶의 지도에 적혀있는 질문들이 있습니다.
"다음을 기약하고 미루고 있는 것은"
"점점 잊어가고 있는 소중한 기억은"
"삶의 마지막 장면에서 어떤 얼굴로 기억되고 싶은가."
이런 질문들은 늘 길을 잃고 나서야 나타납니다.
누군가를 떠나보낸 뒤에야, 몸이 아프고 나서야, 오래 믿고 있던 것이 무너진 뒤에야.
느닷없이 들이닥친 질문 앞에 우리는 무력해집니다.
답을 알아야 가는데, 방향이라도 알아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으니 갈 수도 없죠.
그래서 걸어온 길을 되짚기도 하고, 옆 사람에게 물어보기도 하고, 때로는 에라 모르겠다 하며 무작정 걷기도 합니다.
내면지도를 그린다는 것은 이런 질문을 맞이하는 일이 아닐까요?
길을 잃기 전에, 길을 바라보고, 거리를 가늠하고, 방향을 살펴보기 위해서죠.
얼마 전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런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1년 후 죽는다면, 너는 뭐 하고 싶어?”
친구는 뜻밖에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글쎄... 아, 바디프로필 찍고 싶어.”
너무 예상 밖이라 웃음이 터졌습니다.
“죽는데 바디프로필? 언제 살을 빼고 운동을 하려구.”
그러자 친구는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습니다.
“몸 자체보다 사진이 중요한 것 같아. 딱 제일 멋진 모습으로 ‘나 괜찮았어’ 하고 남겨두는 거지.”
처음에는 그저 우스웠습니다. 마치 SNS 프로필 사진을 바꾸듯, 가장 멋진 모습을 남기고 싶어하는 마음이.
그런데 이야기를 나눌수록 그건 몸의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몸. 젊음. 생동감. 자기서사.
내가 나를 인정했던 순간들에 대한 이야기.
우리는 끝내 하나의 이유를 고르지 못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삶의 중요한 질문들은 대부분 그렇습니다.
오늘의 대답과 내일의 대답이 다르고, 사랑 이후의 대답과 상실 이후의 대답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중요한 건 변하지 않는 결론이 아니라,
그 질문을 계속 삶 안에 남겨두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주로 쉽게 묻습니다.
"그래서 용건은?"
"정확히 말해봐."
"그게 도움이 돼?"
"숫자로 말해줘."
쉽게 얻은 대답은, 쉽게 잃기 마련입니다.
종이컵처럼 한 번 쓰고, 금세 효력을 다하지요.
삶은 늘 효율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당장은 쓸모 없는 시를 외우고,
읽지도 못하는 언어로 적힌 오래된 책을 사오고
또 죽기 전에, 굳이 멋진 사진을 남기고 싶어 합니다.
이런 질문과 선택들은 길을 빨리 찾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직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을, 자기 발자국으로 처음 내는 일에 가깝습니다.
신기한 건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생각보다 좋아한다는 점입니다.
“장례식에 놓을 한 장의 사진은 어떤 모습인가요?”
“답례품에 한 줄을 적는다면 뭐라고 쓰고 싶나요?”
“모든 일의 급여가 같다면, 어떤 일을 하고 싶나요?”
“갖고 있는 물건 중 가장 오래된 것은 무엇인가요?”
처음에는 웃다가도 어느 순간 조용해집니다. 마치 자기 안에서도 처음 발견하는 방으로 걸어 들어가는 사람처럼요. 그리고 종종 말합니다.
“이런 질문은 처음 받아봐.”
“생각해보게 된다.”
“고맙다.”
지도에는 대개 길이 그려져 있습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디서 꺾어야 하는지.
그러나 살아보면 알게 됩니다.
모든 길은 언젠가 망가지고, 가로막히고, 사라집니다.
잘 다니던 길이 어느 날 공사중이 되고,
익숙하던 골목이 가로 막히고,
길도 지도도, 모두 변해있기도 하죠.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건 표지판이 아니라 나침반입니다.
내가 어디를 향하고 싶은지, '거기'는 어디 즈음인지,
방향을 알고 있는 사람은, 길이 끊겨도 길을 냅니다.
지도에 없는 자리에서도 그다음 한 걸음을 디딜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끔 그런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필요합니다.
한 번 말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수정하고 덧붙일 수 있는 질문들로요.
몇 년 뒤 다시 같은 질문을 한다면 우리는 지금과 전혀 다른 대답을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질문들은 사라지지 않는 방향이 되지요.
삶이 완성된 답안이 아닌 계속 수정되는 초안에 가깝다면,
어쩌면 우리는 힌트보다 질문 덕분에 성장하는지도 모릅니다.
"표지판이 아니라 나침반이니까"
지금 적어두는 그 한 줄이,
언젠가 길이 끊긴 자리에서 방향을 일러주는 작은 표지가 되길 바라며
한 번 적어두고 잊지 말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사람이 곁에 오고 떠날 때마다
다시 그 자리에 돌아와 한 줄씩 덧붙여야 합니다.
중요한 이야기는 한 번 말하고 끝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계속 나눠갈 시간을 삶 안에 두어야 하는 이야기입니다.
지도에 표시하지 않은 표지판.
그것에 대해, 오늘도 짧게 한마디 나누어 보면 어떨까요.
아연(Ayn) ('서점여행자의 영감수업' 등 콘텐츠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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